정치권이 또다시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정치의 후진성을 그만큼 타박했으면 나아질 만도 하련만 갈수록 더 엉망이다. 이번에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빌미잡았다. 나 원내대표가 정부의 지나친 북한 편들기를 꼬집으며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주문하는 대목에서 사달이 났다.
국회 연설 원고는 사전에 배포되므로 이의를 제기하려면 진즉 했어야 옳다. 대부분 동료 의원의 연설 원고를 미리 읽지 않는다지만 적어도 제1야당 원내대표의 연설이라면 거들떠보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그러나 뒤늦게 연설 도중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막무가내로 고함을 질러 댔고 원내대표 등 몇몇은 연단까지 뛰쳐나가 연설을 제지했다. 민주당은 폐기된 지 30년도 넘은 국가원수모독죄를 들먹이며 소속 의원 128명 전원의 이름으로 나 원내대표를 국회 윤리위에 제소했고 한국당도 연설 방해를 이유로 민주당 당대표와 원내대표를 맞제소했다. 의정 사상 처음으로 여야 지도부가 동시에 윤리위에 회부되는 정치의 희화화에 헛웃음만 나온다.
여당의 과민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다.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은 처음 등장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작년 9월 ‘유엔에서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 된 문재인 대통령(South Korea’s Moon Becomes Kim Jung Un’s top spokesman at UN)’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 중이던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에게 대북 제재 조기 해제를 역설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뉴욕 타임즈는 한술 더 떠 문 대통령을 “김정은의 대리인(agent)”이라고까지 깎아내렸다. 국내 언론도 당연히 이를 보도했지만 당시에는 조용히 넘어갔다.
아무리 외국 언론이라도 우리 대통령에게 함부로 하면 어느 국민이나 언짢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재연되지 않게 해 달라는 요구는 야당 지도부로서, 나아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무슨 역적질이라도 한 것처럼 연일 몰아붙이는 꼴은 가관이다. 외신에는 한마디도 못하다가 새삼 뒷북치며 충성 경쟁을 벌이는 배경이 궁금하다. 나 원내대표에게 국가원수 모독을 사과하라며 여권의 충성 경쟁을 부채질한 청와대도 온전한 상태로 보기 어렵다.
여당의 망신살은 이게 끝이 아니다. 문제의 기사를 쓴 블룸버그통신 기자의 실명과 경력을 거론하며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주장한 대변인 논평이 문제가 됐다. 서울외신기자클럽은 이례적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기자 개인의 신변 안전에 큰 위협”이라고 규정하고 “이는 언론 통제의 한 형태”라며 논평 철회를 요구했다. 기사는 기자가 쓴 대로 나가는 게 아니다. 언론사 내부에서 다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제목도 새로 붙인 뒤에야 비로소 기사화된다. 따질 게 있으면 기자가 아니라 언론사에 따져야 하는 소이다. 상식을 짓밟고 기자의 개인 신상까지 털어 가며 악담을 퍼부은 집권당이라니 나라 망신이 따로 없다.
문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북한 입장을 적극 옹호하고 대변한 것은 비단 미국과 유엔에서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유럽 5개국을 순방하며 대북 제재 완화를 줄기차게 호소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했다. 중국, 러시아 등 극소수 국가를 빼면 전 세계가 대북 압박이 비핵화를 관철할 최상의 수단으로 믿는 현실을 외면하다 ‘갈라파고스 외교’란 비아냥까지 듣는 판국이다. 최고지도자를 향한 맹목적 충성에 사활을 거는 유일체제를 본뜰 작정이 아니라면 언론과 야당 탄압보다는 우리 정부의 대북 노선을 전면 재검토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북한의 ’선의‘를 외부 세계에 충실히 전달해 한반도 평화 체제 실현을 앞당기려는 문 대통령의 충정이야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실행이 뒷받침되지 않는 선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게 북핵 협상 25년의 산 교훈이다. 남북 관계 과속으로 우리 안보의 기둥인 한미 동맹을 뿌리째 뒤흔드는 지금의 행보는 매우 위태위태하다. 국제사회가 한국을 ‘대북 제재의 구멍’으로 점찍은 터에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 경협, 군축 등을 밀어붙이고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지 걱정이다.
민주당이 나 원내대표의 연설을 훼방한 진짜 목적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 폭로를 막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 원내대표는 정치, 경제, 안보, 민생 등의 국정 파탄을 예리하게 파헤쳤으나 수석대변인 소동에 휘말리는 통에 모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정국을 강대강 국면으로 몰아 지지세력 결집을 꾀하는 것은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도대체 누구를 향한 충성 경쟁이란 말인가. 국민을 좌절시키는 막장 정치는 이제 끝장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