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보면 삶이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가 일생을 한번 살고 한번 죽는다. 태어나면서 우는 이유는 원죄에 대한 슬픔과 깊은 속죄라고 누군가는 말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시대와 국가, 그리고 집안과 환경이 모두가 다른 곳에서 각자가 출생하며 인생을 출발한다.
우리는 7월 중순 두 개의 죽음을 목도하였다. 한 사람은 대한민국 2인자고 불리울 만큼 수도서울 시장인 박원순과 또 한 사람은 100세의 수명을 다하고 돌아가신 고 백선엽장군이다.
그들은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처지도 달랐지만 누구보다도 롤러코스터와 같은 역동의 삶을 사신 분들이다.
고 박원순 시장(67세)은 서울대를 입학하고 유신체제 반대운동으로 그 해에 제적당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대구지방경찰청 검사를 하다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으로 경력을 쌓아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약 10년간 서울시장으로 역임하다 지난9일 자살로 생애을 마감하였다.
고 백선엽 장군(100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려운 살림을 살다 1941년 만주국 소위에서 간도특설대로 전근하여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당시 백선엽은 만주군 "헌병" 중위로 활동하다 종전 후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 1945년 12월 24일에 월남하였다. 소련군의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처벌과 지주들에 대한 재산 몰수에 반감을 품게 된 그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후 다음해 새로 창설된 국방경비대 입대하여 연대장으로 일하다 미군의 물자를 잘 관리하여 신임을 얻고 미군정하의 통위부에 정보국 국장에 이르렀다.
그는 46년 당시 빨치산 남로당 총책으로 지목되어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박정희를 구명하고 전향시켜 박정희를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하였고 그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시키고 자신도 국군 제1사단장으로 복무하다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 후의 그의 업적은 그야 말로 죽음으로 이 나라를 지킨 업적이었다. 그는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하여 반격하여 결국 휴전협정에서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전쟁고아 보육원을 설립하였으며 그 이 후 군의 현대화에 노력하여 참모총장으로 퇴역하여 중국,프랑스,캐나다 대사를 거쳐 약30년간 집필과 경력으로 살다가 지난 10일 백세의 향수를 다하였다.
이 두사람을 둘러싼 비평과 치적에 대한 논란이 이는 가운데 분명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자아포기의 죽음과 100세 호상은 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파란만장한 시대를 헤쳐나온 대한민국의 100년 사에서 이루어 졌던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전, 그리고 유신독재와 민주화의 시대를 거쳐 온 두 사람이 생애는 분명 하나의 대한민국,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세상과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격동의 시기에 접어 들고 있는 이때에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 하리‘ 라는 신념과 용기로 아무리 절망적이고 낙심의 때에도 ’자살‘을 바꾸어 온갖 비난과 역경에도 ’살자‘로 살아가는 생명에 대한 끈질기고 강한 믿음이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창조주에 대한 예의라고 말하고 싶다.
두 분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죽음으로 자신을 마무리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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