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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지역 지도 변천 과정에 나타난 간도영역 고찰(제5편)
2016 한국간도학회 학술세미나 발표) 제5편
기사입력: 2023/03/26 [15:29]  최종편집: ⓒ TOP시사뉴스
서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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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훈 조선말의 한국지도 ,1924 로마교황청 제작

이 일 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약 력

 

▲     ©이일걸 간도학회장

 성균관대학교 학사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 석사,성균관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 취득(국제정치외교학 전공)

 간도지역 역사간도분쟁사 연구한중외교사 연구

본 top사사뉴스 편집부 에서는  한국외교문화영토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독보적인 연구와 논문으로  알려져 있는 이일걸 박사(간도학회 회장)의 논문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있는 국민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간도지역 지도 변천과정에 나타난 간도영역 고찰

(2016 한국간도학회 학술세미나 발표

제5편

윤한택의 논문 고려국 북계 봉강(封疆)에 대하여에서도 고려의 북계는 고려 태조 왕건 시기부터 조선 태조 이성계 시기까지 요동의 지역적 경계는 요수, 요하였고, 그 지역적 거점으로는 요양, 심양, 철령, 개원 등에 걸치고 있었으며, 고려의 ()도 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낼 때 요양-심양 땅을 탕목지로 하였다하여 요양-심양 지역이 대대로 고려의 영토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동녕 요양 지역은 명에 귀속되지 않는 고려 영토였다. , 1372년 공민왕은 명의 정원위(요동)에 문서를 보내어 상고하건대 동녕과 요양은 일찍이 명에 귀속한 바가 없는, 곧 교화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우리 고려와 틈을 만드니 마땅히 이 요새지를 파수하고 방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1388년 명은 철령 이북은 본래 몽고에 속하였으므로 이를 요동에 귀속시키고 그 밖의 개원, 심양, 신주 등의 국민은 다시 생업에 종사하도록 허락하였다는 문서를 고려에 보내어 용납할 수 없는 영토문제를 언급하여 고려의 요동정벌론이 대두되어졌다. 북쪽 경계 인식이 시종일관 요하까지였던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서북쪽 국경을 막연히 압록강으로 설정한 기존의 견해에 대한 재검토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최근 공험진· 선춘령을 실제 답사하여 옛 문헌에 의거 위치 비정을 한 결과의 논문에는 공험진은 수분하의 두 줄기인 속평강과 소화강의 합류하는 지점인 동녕현 도하진 일대에 건설한 오배산성에 비정할 수 있고, 선춘령의 위치는 동녕현 도하진 홍석립자촌의 수분하 남안에 있는 고려령으로 비정하였는데, 고려령 위치는 소수분하를 건너서 높은 산 정상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전략적 요충지에 여기에 경계석을 쌓아 설치하였다. 따라서 동북9성은 실제 기록대로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700리 지점에 위치했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고려시기에 영토와 통치력이 요하와 선춘령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의 역사책에 그려진 고려지도는 윤관의 동북9성이 한반도 내에 그려져 있다. 이는 누구의 책임인가. 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의 책임이다. ·

 

. 초기 간도지도에 나타난 영역 분석

1. 1712년 백두산정계비 설치 이후 조선의 영역

간도영유권 분쟁은 1711년 독단적인 강희제의 상유에 따라 이듬해 1712년 목극등이 장백산으로 여겼던 계림합달에 세워야 할 비를 백두산에 세움으로써 300년의 영토분쟁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목극등이 토문강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두만강으로 오인하여 착오를 범하였다. 목극등은 정계비를 세울 때부터 두만강이 토문강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시(審視)한다는 비의 내용이나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과 이선부의 동행을 거부한 행태와 강의 흐름이 잘 못 되었다는 지적도 무시하였다. 이런 목극등의 실수는 고의적인 의도에서 행한 착오이며 조선의 접반사를 속이려는 행위였다. 지금까지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논점은 목극등의 정계비의 건립과정에서 나타난 강 흐름이 착오로 간주하여 백두산정계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희제와 목극등의 백두산정계비 건립과정은 조선의 접반사를 속여서 착오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교섭자간에 지켜야 할 상호신뢰를 저버리고 고의적으로 착오를 유도하였다는 점에서 착오와는 다르며, 1969년 비엔나 협약 49조는 사기에 대하여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다. 어떤 국가가 교섭에 참가한 다른 국가의 기만적 행동에 의하여 조약체결을 하게 되었을 때 기만을 당한 국가는 구속을 받겠다는 동의를 무효하하기 위하여 이 사기를 원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강희제와 목극등의 백두산정계비 건립은 고의적으로 조선을 속여, 백두산 일대를 차지하려는 사기 행위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들의 행위는 백두산과 장백산을 보는 시각, 즉 중국 지금까지도 백두산을 굳이 장백산이라 우기며, 장백산의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김수홍이 제작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에는 죄측에 장백산이 있고, 우측에 백두산이 존재한다.

목극등은 이 일대를 수차 탐사하여 장백산 지역과 백두산 지역이 흡사하여,

 

▲     ©서훈  지도 당빌지도1735 조선왕국전도 레시건

 

 

우측의 백두산에 비를 세움으로써 청은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를 위헤 성경지도 및 황여전람도 마저 변조작업을 하여 조선의 괸리들을 혼란케하였다.즉 강희제의 상유에 나타나는 압록강은 환인지역 북에서 발원하는 동가강으로, 토문강은 휘발하 상류의 토문하이다. 토문하가 발뤈하는 장백산은 계림합달이다.따라서 백두산의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변조하여 지도에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     ©서 훈 지도 당빌지도17321중국령 달단전도 ,당빌선

 

 

이와 같이 조선과 청은 세칭 문제의 백두산정계비를 세운고 150년이 지나서 러시아로 넘어간 유민들에 대해 1869년에 청의 주선으로 유민들의 쇄환문제가 처음 일어났으며, 간도 긺림지방의 조선인 쇄한 문제는 고종8년 김광우 등을 파견하여 454명을 압송하였다. 조선에서는 북관 유민의 월경 및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김유연을 안무사로 파견하였다.

청은 광서 41878년에 압록강 이북의 봉금을 해제하여 개간을 실시하였으며, 1882년에 조 청간에 토문강 이북 이서의 점간하는 조선인에 대한 문제가 양국간에 간도분쟁의 시작이었다. 간도 명칭의 유래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홍남주설이 가장 타당하다. 1870년 대흉년 때 회령부사 홍남주는 백성들에게 두만강 이북의 월강을 허락하여, 양전관을 파견하고 토지대장과 야초(지세명기장)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을 간도토지대장이라 불렀고 두만강 건너편을 간도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회령 부근의 개산둔진의 선구촌 마을에 삼각주가 있어 매우 기름진 땅이라 월강민들이 이곳을 먼저 개관하였다. 지금은 육지와 연이어져 있지만 이곳을 사람들이 사이섬이라 불렀으며 간도 개간지의 상징이 되었다. 연변동포와 향토사학자들이 2000년에사이섬이라는 비를 세웠지만 중국 당국이 비를 폭파해버렸다.




따라서 한말 북간도 지역이 서간도 지역보다 봉금의 해제가 빨라 많은 사람들이 17세기부터 이곳 사이섬부터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간도의 명칭은 이 사이섬에서 시작되어 점점 북간도지역과 서간도로 펴져나갔다. 이러한 월강하여 개간현상이 지도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성운의 철판조각본인 <지도6>‘대한전도1907, <지도7>‘신정분도 대한제국지도<지도9>‘함경남북도1908년 현공렴에 의해 제작되었다.현공렴에 의해 3일 늦게 19081124일 제작한 <지도8>‘대한제국지도지도는 위 부분이 좁게 그려져 있다.장지연의 또한 장지연의大韓新地誌에 게재된 함경북도지도는 송화강으로 흐르는 토문강이 그려져 있으며,‘北墾島표기하였다.

 

▲     서훈   지도6 간도 조.청인구 비교표 통감부임시파출소 조사 출처 윤낙현. 간도는 왜 우리 땅인가(2013)

 

  © 서 훈 조선말의 한국지도 ,1924 로마교황청 제작



▲     ©서훈       지도5 간도 지형약도.  현규환. 한국유민 P40

 

 

  © 서훈 지도14 백두간정계비

 

 

 

  © 서훈  지도 13조선정계비 강역약도

             규장15504호




 

  © 서 훈 지도16 1899년 북변간도관리도 (고동학교역사부도   교학사발행 2003.3.1

 

  © 서훈 그림11 압록강 두만강 연안도 1911 한국침략사료충서 20권




         

  © 서훈 지도 북관도도 .정약용

▲     ©서 훈    사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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