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잔의 물’로 마감된 「워싱턴 선언」
4월 26일 백악관에서 개최된 윤석열-바이든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하여 과거 어떤 정상 만남보다 큰 의미를 가진 분수령적인 외교행사였다.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정상회담임 만큼 규모와 다양성에 있어서도 특별했지만, 한국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대륙으로부터의 안보위협과 북핵 위협’에 직면한 시점이어서 핵안보와 관련하여 어떤 합의가 도출될 것인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이 쏠린 것이 사실이었다. 경제·무역·기술·에너지, 반도체, 통신, 국제평화 증진, 북한 인권, 기후변화, 환경보호, 우주개발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철통같은 협력’을 다짐하고 포괄적 동맹으로의 발전에 합의하는 장문의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지만 국민의 관심은 북핵위협에 대처하는 내용을 담아낼 「워싱턴 선언(Washington Declaration)」에 쏠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뜨거운 관심 속에 발표된 「워싱턴 선언」은 북핵 억제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매우 반가운 내용으로서 일반 국민을 안심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근본적 북핵 대처의 시급성을 절감하는 전문가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반 잔의 물’이었다. 「워싱턴 선언」에는 한국 국민을 안심시키는 ‘설득(persuasion)’과 한국 국민의 전술핵 재배치 또는 독자 핵무장 열망을 단념시키는 ‘만류(dissuasion)’가 혼재되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핵안전에 대한 확신(assurance)을 주기에는 미흡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채운 반 잔의 물은 매우 소중한 성과였고, 앞으로 채워야 할 나머지 반 잔의 물도 매우 절실하다.
미국 정부의 대한(對韓) 설득 노력
「워싱턴 선언」의 내용 중에는 미국 측의 요구를 반영한 내용들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도-태평양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노력(committed to peace and stability in the Indo-Pacific)은 미국의 대중(對中) 전략에 한국을 포함시키고자 하는 여망이 반영하는 표현이며, ‘한국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및 한미원자력협력협정 준수(commitment to its obligations under the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and the U.S.-ROK Agreement for Cooperation Concerning Peaceful Uses of Nuclear Energy)’는 한국의 독자 핵무장 또는 이를 위한 농축·재처리 시도를 단념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표현이었다. ‘북한과의 전제조건 없는 대화와 외교 추구(pursuit of dialogue and diplomacy with the DPRK without preconditions)’는 향후 미북 간 핵협상 재개 가능성에 대해 미리 한국의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미 확대억제 공약에 대한 완전한 신뢰 및 미 핵억제에 대한 지속적 의존의 중요성·필요성 및 이점 인식(full confidence in U.S. extended deterrence commitments and recognition of the importance, necessity, and benefit of its enduring reliance on the U.S. nuclear deterrent)’에는 독자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는 잊고 미 핵우산을 믿으라는 강한 메세지가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별도의 「워싱턴 선언」을 발표한 주 목적이 한국의 핵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것에 있었던 만큼, 한국을 안심시키는 표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를 들어, ‘더욱 강화된 상호방위관계(an ever-stronger mutual defense relationship) 및 연합방위태세 유지 확약(affirm in the strongest words possible their commitment to the combined defense posture), ‘한반도 핵사용시 한국과 협의하기 위한 모든 노력(every effort to consult with the ROK on any possible nuclear weapons employment),’ ‘북한의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핵협의 그룹 설립(a new Nuclear Consultative Group to strengthen extended deterrence),’ ‘핵억제 관련 심층적·협력적 정책결정 관여 및 핵위협에 대한 소통 및 정보공유 증진 (deeper, cooperative decision-making on nuclear deterrence including enhanced dialogue and information sharing regarding growing nuclear threats),’ ‘유사시 미국 핵 작전에 대한 한국 재래식 지원 협력(ROK conventional support to U.S. nuclear operations in a contingency),’ ‘양국간 새로운 범정부 도상 시뮬레이션 도입(a new bilateral, interagency table-top simulation to strengthen our joint approach to planning for nuclear contingencies),’ ‘지속적이고 철통같은 방위 공약(enduring and ironclad States’ commitment),’ ‘한국에 대한 핵공격시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에 직면(any nuclear attack by the DPRK against the ROK will be met with a swift, overwhelming and decisive response),’ ‘핵을 포함한 미국 역량을 총동원하여 확장억제 지원(commitment to extend deterrence is backed by the full range of U.S. capabilities including nuclear),’ ‘향후 미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방문 등 미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 증진(further enhance the regular visibility of strategic assets to the Korean Peninsula as evidenced by the upcoming visit of a U.S. nuclear ballistic missile submarine to the ROK),’ ‘잠재적 공격 및 핵사용 방어를 위한 확장억제전략협의체 포함 (정부 간) 상설협의체 강화(strengthen standing bodies for consultations on extended deterrence, including the Extended Deterrence Strategy and Consultation Group to defend against potential attacks and nuclear use)’ 등 한국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풍성한 언어들을 담아냈다.
향후 과제로 남은 ‘한반도 핵균형’
핵외교나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 설득이 물건너 간 현 상황에서 한국이 북핵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핵균형을 통한 남북 간 핵비대칭의 해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당장은 미국 핵역량을 통한 ‘제1단계 핵균형’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 핵심은 미 전술핵 재배치일 수밖에 없다. 북핵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미국이 한국의 자체 핵무장에 동의하는 시점이 도래하면 자체 핵무장을 통한 ‘제2단계 핵균형’으로 가야 하기에 이 또한 지금부터 준비해나가야 한다. 이런 목표들에 비추어 본다면, 「워싱턴 선언」은 제1단계 핵균형에 못미치는 내용이었다. 핵심인 ‘전술핵 재배치’나 ‘인근지역 전술핵 상시 배치’와 같은 조치들이 빠졌으며, 한국의 독자 핵무장에 대해서는 가능성을 열어두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핵무장을 억제하는 ‘병마개(bottle cap)’ 역할을 계속하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명시되었다. 한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볼때 의심할 여지가 없는 ‘대남 핵공격시 주저없는 자동적 핵응징’을 담아내기를 원했지만 이 정도 강도의 표현은 포함되지 않았다. ‘핵탑재 전략핵잠수함의 상시 배치’를 원했지만 이 또한 ‘전략핵잠수함 방문 등을 통한 정례적인 전략자산 전개’ 수준에 머물렀다. 요컨대, 「워싱턴 선언」은 한 차원 더 강력해진 공약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또 한 번의 말잔치’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나토식 핵공유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상 전술핵 재배치에 준한다”등 일부 전문가들의 과장된 분석이나 언론의 선별적 보도는 「워싱턴 선언」에 대한 국민의 정확한 이해를 방해할 수 있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국은 핵방패를 손에 쥐었다” “한미 간 핵협의그룹(NCG)이 나토의 핵기획그룹(NPG)보다 더 효과적,” “북 핵공격시 미 핵포함 총동원,” “핵탑재 잠수함 한반도 정기 출격” 등 언론들이 사용하는 ‘섹시한 제목들’을 보면 이제 북핵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정확하게 말해 「워싱턴 선언」은 외교적 상징성은 커지만 군사적 의미는 제한적인 선언이었다. 미국이 전술핵 재배치에 선을 긋고 있는 부분은 한국에게 험란한 핵외교 과제를 남기고 있으며, 특히 독자 핵무장에 대한 미국의 분명한 반대는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고 핵무력을 증강하게 하는, 즉 평양정부를 안심시키는 측면도 포함되어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결국, 「워싱턴 선언」은 국가안보와 국민안전에 에 큰 보탬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을 남긴 선언이었다.
한국이 풀어야 할 당면 숙제는 ‘정치적 안정성’
미 핵역량을 한국이 원하는 수준과 방법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한국 쪽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이 적지 않다. 한국이 친서방 정권과 친북·친중 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는 정치적 불안정을 반복한다면 또는 언제든 북한정권과 내통하는 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나라로 간주된다면, 어느 동맹국이 이런 나라에 소중한 전략자산들을 상시 배치하려 하겠는가. 사드(THAAD) 배치를 둘러싸고 온갖 괴소문을 퍼뜨리고 반대운동을 펼치는 세력들이 설치는 나라에 미국이 극초음속 미사일을 배치하려 하겠는가. 일부 정치인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버린 북핵 문제와 그로 인한 안보위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정부의 확대억제 강화 시도에 대해 “대북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다”며 발목을 잡고 있지 않는가. 이런 국내 여건들을 감안한다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거둔 동맹 및 북핵 억제력 강화 성과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정부는 북핵대응에 관한 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고 국민은 정치적 안정성이 없으면 동맹관리도 어렵고 북핵대응도 힘들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칼럼은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이 오늘(4월28일) '펜앤마이크'에 게재한 글입니다)
김 태 우 (defensektw@hanmail.net)
(전) 통일연구원장
(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전) 동국대• 건양대 석좌교수
(전) 대통령 외교안보자문교수
(현)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저 서
'북핵을 바라보며 박정희를 회상한다' 외 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