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출판기념회 두고만 볼 것인가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와 북콘서트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나 예산안 심의를 앞둔 시점에 출판기념회를 열어 관련자나 관련 기관에 로비 또는 보험 가입을 강요하는 신호를 보내며 노골적인 정치자금 수금에 나서는 게 관행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책 출판은 손뼉 치며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에서는 그럴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다. 편법적인 정치자금 모금행사로 변질돼 버렸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는 선거일 90일 이전까지만 허용한다는 규제만 있을 뿐 책값 명목으로 모금하는 돈은 정치자금과 달리 한도도 없고 수입 내역 공개 의무도 없다.
정치인이 받을 수 있는 후원금의 연간 한도액은 국회의원의 경우 1억5000만 원(선거가 있는 해에는 3억 원)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출판기념회를 열어 챙기는 책값은 정치후원금에 포함되지 않는다. 뒷문 열어 놓고 후원금을 얼마든지 받게 하면서 앞문만 단속하는 정치자금법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책은 지식의 보고다. 독서는 지식 창출 행위이자 보물을 캐는 작업이고 저자와의 대화다. 독일의 사상가 막스 베버는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고 했다. 바쁜 정치인이 책을 직접 쓴 것인지는 알 수 없고, 그 내용 역시 독자의 평가에 맡길 일이지 여기서 따질 건 아니다. 하지만 모금용 행사 전단이나 다름없이 대부분 폐기 처분되는 책이라면 출판문화의 모독이자 사회적 낭비다.
북콘서트는 저자와 독자가 책에 관한 담론을 주고받거나 질의응답을 하는 모임으로 이름만 다를 뿐 출판기념회와 다를 바 없는 출판 잔치다. 하지만 그런 출판 잔치가 책에 관한 담론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외설과 분노, 적개심이 묻어나고 비루한 말들이 쏟아지는 난장판으로 변할 때가 많은 게 현실이다.
자녀 입시 비리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자,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를 뿌린 의혹으로 구속된 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후원금을 횡령한 혐의로 항소심에서도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받은 자를 포함해 이런저런 허접한 정치인들이 출판 잔치를 열고 있고 거기에서 온갖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암컷이 설친다”(전 국회의원), “방울 달린 남자들”(성직자), “발목때기를 분질러 놨어야 했다”(현 국회의원)는 등등의 험한 저질 막말과 욕설이 그런 예다. 하물며 술판에서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말들이 출판기념회나 북콘서트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니 해괴하고 민망한 일이다.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서로 추켜세우는 걸 누가 뭐라 하랴. 그러나 출판기념회와 북콘서트가 열리는 곳은 엄연히 공공장소다.
출판이 제재 대상일 수는 없다. 정치인이 자기의 철학과 신념과 정책을 유권자에게 알리는 일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다만 선거를 앞두고 서둘러 책을 출간하고 편법으로 후원금을 끌어모으는 게 문제다. 정치인이 훌륭한 책을 펴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정치인이나 정치 지망생이 좋은 책을 저술했다면 일반인들처럼 그냥 서점에서 팔면 된다. 출판기념회를 한 번도 하지 않은 3선 의원 출신이 언젠가 “책을 낼까 생각해서 글을 써 놓기도 했지만 그런 글을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게 양심상 허락이 안 됐다”고 말했다. 양심적이고 울림이 있는 말이다.
어쨌든 ‘돈 봉투’ 출판기념회는 바뀌어야 한다. 그동안 출판기념회에 대한 비난이 일 때마다 정치권은 “정치자금법을 정비하겠다”거나 “회계 투명성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말뿐이었다. 기막히게 좋은 정치자금 모금창구를 스스로 닫겠다고 할 정치인이 어디 있으랴. 출판기념회를 그대로 둔다면 무엇보다 먼저 정치인 스스로 책값으로 받은 금액을 밝히게 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출판기념회를 공식 후원금 모금행사처럼 통제해야 한다. 금액 한도도 없는 사실상의 정치자금 모금을 조장할 까닭이 없다. 정치자금 투명성 높이기와 돈 안 쓰는 정치를 위한 노력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출판기념회 문제는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운동’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여론을 일으켜 정치권을 압박해야 답이 나온다. 정치인들에게 맡겨서 풀릴 문제가 아니다.
류 동 길 (yoodk99@hanmail.net)
숭실대 명예교수
남해포럼 고문
(전)숭실대 경상대학장, 중소기업대학원장
(전)한국경제학회부회장, 경제학교육위원회 위원장
(전)지경부, 지역경제활성화포럼 위원장
저 서
경제는 정치인이 잠자는 밤에 성장한다, 숭실대학교출판부, 2012.02.01
경제는 마라톤이다, 한국경제신문사, 2003.08.30
정치가 바로 서야 경제는 산다, 숭실대학교출판국, 2018.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