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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역사적 진실 증언
5.18 역사적 진실 증언
기사입력: 2018/06/05 [16:44]  최종편집: ⓒ TOP시사뉴스
서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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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3.  서욾태극기 집회에서 찍은   신동국목사 근황



5.18 역사적 진실 증언

누구도 막지 못하는 현장지휘관의 역사적진실정의의 절규!!!

해묵은 국민적 의혹 (암덩어리)제거 하는 대수술 단행!!!

 

 

나(우리)는 보았다(북한 특수군)

당했다(놈들에게)

최초사격명령은 내가했다(놈들을 향해)

그리고 ~ ~

는 내일도 동에서 뜨고 지구는 돈다

▲     © 서성훈

 

▲     © 서성훈



2018.3.14일 오후 1시반경 5.18 역사왜곡 진상대책 국민연합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신 동국 목사님을 만나 5.18의 역사적 진실의 증언을 듣기 위하여 인터뷰를 요청하여 대구 대명동의 신목사님의 조그만 아파트 서재에서 허락을 해주셔서 만났다

오후 1시반에 도착하여 목사님댁의 서재에 들어서니 많은책과 눈에 띄는 엄청난 구호가 적인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그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5.18역사적 진실 증언

최초의 사격명령은 나다

 

문재인 대통령 “5.18재조사 지시 (멍석)

확실히 조사하자!

묻혀진 진실 바로알고 대처하자!

5.18역사적 진실 중언

5.18역사왜곡 진상대책국민연합 공동대표 신동국

당시 11공수 62대대4지역대 2중대6지대장 중위 신 동국

 

▲     © 서성훈

 

▲     © 서성훈


모든 글귀 들이 생명력이 있었고 그 분위기가 기자의 마음을 두근 거리게 했다

 신 동국 목사는 53년생으로 뒤 늦게 목사의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늦깍이 목사가 되었느냐는 물음에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인데다

우리가족 7남매 중의 4남인 저를 어머니가 자식들 중에 한사람은 꼭 하나님의 종으로 되기를 원했는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의감 의협심이 강했다고 봅니다 ROTC학창시절부터 시내뻐스를 타고가다가 여대생들의 지갑을 훔치는 칼 들은 삼삼오오의 쓰리꾼들

아무도 겁이나서 나서지 않는 그 현장에서 쓰리꾼들을 처단하고 해결해 주었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고 수 십번이 돨 것입니다

아무리 사례를 하겠다고 하였으나 할 일을 했다며 절대 사례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5.18사격 명령하게 된 정의감과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가 ?

 

이 사건을 발표하는 것도 어지간한 용기가 없어면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거든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범죄 행위다 라는 것이 저의 어릴 때부터 신조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저의 마음에 늘 팽배해 있었습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정의감에서 목이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 됩니다

군을 제대 후 결혼하여 지금 1남 2녀가 있고 아내와 자식들은 지금은 다른 집에서 살고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5.18문제 진실을 밝히는 운동을 하자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군 제대 후 은행등 금융인으로서 약 20년 가까이 살았고 은행에서 최 우수금융인으로도 뽑혀 미국에 연수도 갔다오고 은행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읍니다

고향인 경북고령에서 태어나 대구중, 고등학교졸업. 경북대학 재학중 ROTC입대 자랑스런ROTC인상 수상 동서화합추진위원장. 건국대학교경영학과 박사수료 등 학력, 경력, 수상경력 저서등이 상당히 화려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오신걸로 추정되나 온화한 모습과 언행들이 마치 전쟁터와 같았던 광주사태의 최전방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용맹을 떨친 용사의 모습하고는 모든 것이 매취가 잘 안되었다

 

군에 입대 할 때부터 몸이 약하고 체격도 왜소한 편이고 눈도 나쁘고 해서 ROTC 입관시 에도 시력이 나빠 안경 쓴 사람은 본인 혼자였다 고한다

저를 아는 친척이나 ROTC동기생들은 힘든 군대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더구다나 공수부대의 힘든 극기훈련을 이겨내지 못 하고 보충대로 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ROTC 동기생들 중에 2명만 공수부대에 차출이 되었는데 제가 그 한명으로 차출이 되었습니다 고되고 힘든 군대생활이 된다고 다 들 싫어하는 공수부대 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믿는 사람으로써 공수부대에 차출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공수부대의 힘든 훈련을 견디어 냈고 몸과 마음은 더 튼튼하여 졌고 인내력 , 투지력과 상황 판단력의 능력이 성장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11공수특전사령관 표창장등 다수의 상장도 받았습니다

11공수 황금박쥐 여단입니다 38도선 이북에서 훈련을 받았읍니다

11.26사태직전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쉬던 중 박정희 대통령서거의 비보를 듣고 부대로 복귀하였다

 

▲     ©서성훈

 

이때부터 나라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김대중 일당과 야합하여 남한을 전복하기위한 목적으로 서울과 광주에 남파 간첩들을 내려 보내었읍니다

현 정부(최규하 대통령, 신현확총리)의 내각이 19일까지 총사퇴하지 면 광주 사태를 일어키겠다고 선언 하였습니다

이와 아울러 광주에서는 대규모시위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서울과 광주에서는 약 15~20만의 인파가 모였습니다

이런 시위를 틈타 북의 특수군들도 이미 해제된 경계망을 피해 영광등해안과 육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엄청난 숫자가 침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국 대학생 대표들이 청와대로 진격하자고 주장도 하였습니다

그때 지금의 국회의원인 심 재철이(광주일고출신) 서울대 학생회장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청와대로 처 들어가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들은 공수부대가 출동한다니 포기하였으나 일부 약600명 정도는 투쟁을 중단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며 광주로 내려갔다

김대중 일당과 그 추종세력의 주장과 똑 같은 주장 이었습니다

5.18 비상계엄선포가 일어나는 날 우리들은 낮과 오후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출동명령이 나서 트럭으로 청량리 역에서 열차를 탑승해서 새벽 광주 송정리역에서 도착하여 목적지 조선대학교에서 먼저 와 있는 선발대와 합류하여 아침을 먹고 잠시 쉬었다

새벽과 아침은 너무 조용했었다

폭풍전야의 조용함 이었다

광주 금남로 충장로 일대(도청. 경찰청. 조선대)에서 1980.5.19. 5.20. 5.21 3일간 광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5.18단체나 현 집권당에서 집중하여 보도를 하고 있읍니다 수십만이 모인 그 3일간의 핵심장소가 금남로일대 이며 3일간의 사건에 주인공이 저와 저의 부대원들입니다

경찰서. 기동대요원들이 경찰서와 파출소에서는 무기를 빼앗기고 팬티 바람으로 달려와서 목숨을 살려달라고 했다

북한 특수군을 만나고 북한군이 왔는것이 확실하고, 폭동이 확실하고, 내란이 확실하고, 남침이 확실한데 이것이 민주화로 둔갑되어 엄청난 웃기지 못 할 현실이 되었읍니다

▲     © 서성훈



 

5.18 최초 발포 명령자가 누구냐 ? 그리고 그 상황의 설명을 요청하자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하였다

 

1.그것은  당시  북한 특수군과  고정간첩

그리고 핵심추종세력을 향해 

<제가 최초 ' 발포명령' 을 내렸던  장본인!!> 이었음을

정히 (만방에)밝혀 드립니다(드리는 바입니다).2.  야합과 추종세력 79년 10.26 사태로   대한민국의 강력한 영도자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한  후  (그 틈새를 이용해 ) 적화통일  야욕에 불탔던  김일성과 김대중  일당의 야합으로 

많은 북한공작원들이  전남  일대에 미리  잠입해  들어와  각종  유언비어를 날리는  등 흑색선전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많은 시 도민들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게 되었고 이에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3. 시네마스코프 적 작전 ㅡ 기소 충분이와 같이 5.18은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북의 김일성과 남의 김대중 일당에 의해   수립되고 추진된 시네마스코프  적  작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이미  밝혀진 것만으로도  북한을 범죄국가(犯罪國家)로  김일성 김정은을 전범자(戰犯者)로 국제사회에 기소(起訴)하기에  충분합니다.}4. 엄청난 파괴력당시  5월 21일  놈들은 최고 비밀정보인  군 부대이동 정보를 빼내 육군 모 사단을 격파하고 이어  <아시아자동차>를 침투하여 장갑차 4대와  수 백대  트럭을 탈취하여  일부는 전남일대   44개  지파출소   무기고를 습격하러 출격하고   일부는 수십만  시위대가 운집해있는 금남로를  따라 우리  특전사가 죽음으로 사수하고 있는  최후저지선(最後沮止線)  최전방전선(最前方戰線)까지  출격해 왔던 것입니다.저는 그 당시 최후저지선 맨 앞  선두  왼쪽에서   사랑하는  부대원들과 함께 

죽음으로서  사수하며 동지들을 독려하며  전방경계에 몰두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5. 선제공격(先制攻擊)14시경 놈들은   탈취한 장갑차에서    최전방을 방어하고 있는   특전사측 장갑차를  향해  화염병을  정확하게  투척하면서 틈새  즉 취약점을 만들면서   수 십대 트럭과  핵심추종자를 포함한 선발대 요원들이  돌 ㆍ 병 ㆍ각목  등을  던지며   당시 실탄도 없는  군을 향해  선제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이로인해  당시  거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러나 당시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사느냐 죽느냐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에  저와 부하 동지들은  이미 후방에  들어온 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저는 <퇴각명령> 을 내렸습니다.6. 선제사격(先制射擊)그사이 놈들은  금남로 일대에서 장갑차에서  LMG  등으로  아스팔트 를 쏘고  

{( 지금 한창 핼기 탄흔으로 매스컴에 뜨고 있는 )전일빌딩!}

전일빌딩에서도 일부 카빈소총으로 금남로 쪽을  향해  선제   위협사격 등을 가해왔습니다.

{(사실 얼마 전 국방부에서 발표했던 전일 빌딩에서의 헬기 탄흔은 엉터리요 사기요 조작이요 ** 나아가  국민기만행위인 것입니다.)}당시  (놈들은)  (**이와같이)실탄도 없는 우리 특전사를 초 죽음상태에  몰아넣었던 것입니다.잠시 후  우리는   여단본부가 있는 도청 앞  분수대 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7. 2차 본대공격잠시 후 선발대(선제공격)에 이어 

2차  본대가 공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선발대  공격만으로도 특전사가 박살이 났는데  2차 본대의   공격은 엄청난 위협이  되어졌습니다.요란한  깃발과 현수막

그리고 머리에 붉은띠 흰 띠를 두른   (북한)핵심 주도세력에 이어 

폭도화 된 수십만 끄나풀 시위대가 따랐습니다.

우리군은 모두 전멸의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다들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당할 

급박한  순간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당시 적들은 이미 우리 경찰서ㆍ지파출소 무기고들을  습격하여  수만 수십만 각종  무기들을 탈취했다는  정보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군들에게 실탄이 주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8. 실탄배분요청이윽고  생명의 위기를 느낀   부하들이  저에게  ‘실탄을  달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상사(지역대장 등)께  실탄배분을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당시 중대장은 보이지 않았음)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대대본부와  여단본부에서는 실탄배분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가

"실탄배분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부하장병들  모두 잃는다. 너희들도  살아남지 못한다" 고 말하니

잠시 후 실탄이 선별적(選別的)으로 한 탄창씩 배분되어졌습니다.9 . 지역대별 거점확보 (據點確保)그리고 지역대 별로   <거점을 확보하라>는 말없는 지시에 따라 우리 4지역대는  지역대장의 지시에 따라 분수대 앞  수협 빌딩(지금은  사라졌음)으로 올라갔습니다. 빌딩옥상에서는 각 병사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평소  훈련 받아왔듯이  각자 Position 을 확보하여 사격자세를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지금  북한 특수군과  핵심추종세력을  앞세운 수십만 끄나풀 폭도들이   숫자적으로 얼마  안되는  국군을 죽일려고 노도와  같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를  저지할  길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1차  선제 공격과 선제 사격으로 박살이 났죠 2차 수십만  북한 특수군과  끄나풀  폭도들이  군을 다 죽여 버릴려고 노도와 같이 공격해 오고 있는  이런 상황인 것입니다.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  이런 상황 하에서는(*군으로서) 사격 밖에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0. 잠시 정적옥상 거점을 확보한 우리 지역대 요원들은

각자가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누구하나 발포명령을 하거나   사격을 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당시  저의 상사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사격 명령을  내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11. 신호탄격 최초 한발 발사이때 저에게  뇌리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 너가 나서야한다, 나서야한다, 당장 나아가라” 는 내면적  명령 ㅡ 하늘의 계시, 하늘의 메세지가 들려졌습니다.그와  동시에  저가  하늘을 향해  최초 한발을  <신호탄격>으로 발사했습니다.12. 집단 발포그 신호탄 발사를 보고 지역대 장사병들의

산발적인 사격이 시작 되어졌습니다.

상당수는 위협 사격만을 했지만 엄청난 위협을 감지한 일부 명사수 하사관들은 적 핵심 분자들을 향해 정조준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저가 실탄배분을  강력히 요구하여  실탄이 배분되어졌고   사격 시  최초의  신호탄격으로 공포탄을 쏘아  집단 발포가 이루어졌기에 저가  5.18  당시  최초  발포명령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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