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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개월 만에 다시 열린 나라보물 숭례문
기사입력: 2013/05/19 [06:06]  최종편집: ⓒ TOP시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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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호인 숭례문이 돌아왔다.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지만 2008년 2월 11일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불타버렸던 숭례문이 5년3개월의 복구공사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에 들어간 비용만 245억 원, 연인원 3만5000여 명이 동원됐으며 각 분야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251명이 참여했다. 숭례문은 1398년 세워진 후 외세의 강공과 6·25 전쟁의 혼란에도 이 땅의 외침을 담아왔다. 숭례문에 불이 난 것은 한 70대 노숙인의 방화 때문이었다. 방화로 밤새 숭례문이 타 들어가 무너질 때, 국민의 가슴도 탔고 민족의 자부심도 무너져 내렸다. 

숭례문 복구는 불에 탄 문화재를 다시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무너진 민족의 자부심과 역사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정성을 쏟았고 사료에 충실했다. 손으로 빚은 기와는 전통 가마를 만들어 구웠고, 단청은 천연안료를 써서 우아한 색감을 되살렸다. 우리 시대 최고의 장인들이 돌 하나하나, 기와 한장 한장에 땀과 혼을 불어넣었다.

한국전쟁 때 피해를 보아 임시로 복구했던 현판도 조선시대 탁본을 구해 원래 필체의 모습을 되찾고 일제에 의해 철거된 좌우 성곽도 복원했다. 동쪽으로 53m, 서쪽으로 16m밖에 되살리지 못했다. 성곽 복원에 쓰인 돌들은 옛날 석수들이 사용하던 정과 망치로 쪼고 다듬었다. 전통 자료와 사진을 확보한 다음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화재감지기와 스프링클러, CCTV도 신설하거나 증설했다.

숭례문은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를 불로 다스리기 위해 다른 문과 다르게 세로로 쓰도록 했다.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자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가리킨다.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도록 비보를 쓴 것이다. 세종대왕의 맏형 양녕대군이 현판 글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형문화재는 한번 훼손되면 원형 복구가 힘들다. 국가 차원에서 문화재를 관리·보호하는 문화재보호법 등 총체적 시스템을 강화하고, 문화재 방재 위기관리 체계를 계속 점검해야 한다. 전국 각지에 산재한 각급 문화재들을 우리가 얼마나 소홀히 다루고 있는지 반성하고 먼 후대에까지 온전히 보전하는데 열과 성의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문화재는 우리 역사와 얼 그 자체란 인식을 갖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일수록 정신의 산물인 문화유산을 아끼는 문화의식이 절실하다. 문화재에는 조상들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공동체적 가치가 담겨 있다. 숭례문은 문화재 복구의 차원을 넘어, 시대적 상징을 은유하고 있다. 다시 돌아온 소중한 숭례문 모두가 소중하게 아끼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숭례문뿐만이 아니다. 두 번 다시 하루아침에 수백 년 역사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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