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가부채는 전년보다 127조원(8.2%)이 증가해 총 1700조원에 육박했다. 이중 940조원이 공무원·군인연금 부채로 총국가부채의 56%가 이들의 연금을 떼어주느라 발생한 것이다. 특히 작년의 부채증가액은 74%(94조원)가 공무원·군인연금의 예상부족분 증가 때문에 발생했다. 이런 추세는 향후 가속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연금주도형’ 국가부채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새 정부는 이런 공무원을 지난 2년간 4만2천명 더 뽑았고, 금년에 3만6천명을 증원키로 했다. 이 정권의 공약인 17만5천명을 증원하면 향후 30년간 지급해야 할 급여가 327조원, 퇴직 후 받아갈 연금은 92조원에 달한다고 정부는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국민의 수명장기화 추세로 보아 앞으로 근무한 년 수보다 더 오래 살아 30년 봉급보다 더 많은 연금을 타갈 사람은 부지기수(不知其數)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후 정부예산은 증대일로에 있다. 2018년은 전년보다 7.1% 늘어난 429조원, 2019년엔 9.7% 증가한 470조5천억 원으로 그 증가율이 해당기간 경제성장률[2.7%]을 3배 이상 초월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든 추경을 더 편성해 나랏돈을 풀려 애쓰고 있다.
정부의 이런 재정확대 증세는 정권이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울 때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소득주도성장에 국가재정처럼 좋은 수단이 없다. 국가 돈을 많이 풀수록 공무원은 물론 단기알바 노인일자리 임시직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고, 실업자 취업자 아동 학생 주부 등 누구에게나 현금수당을 만들어 살포할 수 있다. 나아가 기업이 고용한 자의 임금의 일부까지 지금 정부가 맡아 지불하고 있다.
한편 정부가 키워질수록 시장과 기업의 역할은 작아지며, 국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의 길을 가게 된다. 이 정부는 최저임금을 2년간 29% 올리고, 법인세를 올리고, 노조의 전횡을 방치-조장하고, 기업의 통제, 소유권과 경영권의 통제를 강화했다. 이 추세가 장기화되면 기업의 역할, 경쟁력 따위의 개념은 사회에서 점차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이리해서 정부가 서서히 기업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큰 정부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포퓰리즘 광풍을 불러오게 한다. 민주주의의 정치형태를 가지는 한 국민의 표를 사야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1월 24조원 규모의 23개 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검토[예타]를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비수도권 공공사업에 대해 경제성 평가 비중을 대폭 낮추는 제도개편을 발표했다
예타의 핵심은 경제적 타당성을 조사하는 것이다. 국가건 기업이건 사전 경제성조사없이 사업투자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모든 공공사업에 예타를 부과하는 이유는 이것이 정치가들이 제안하는 무절제한 선심성 재정사업을 걸러내는 방패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없애거나 기준을 낮추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국가의 도덕적 해이며 포퓰리즘의 극치가 된다. 이로서 이 정권도 과거 자신이 그토록 질타하던 토건재정사업에 국민혈세를 본격 투입하고, 아무 생각 없이 선거와 자리에만 연연하는 지자체에 무한히 돈 풀 기회를 열어주게 됐다.
정부가 기업이나 개인으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걷고, 빚내어 쓸수록 민간 경제활동이 그만큼 위축됨은 경제학 이전에 일반의 상식이다. 정부가 걷어낸 만큼 시장이 줄어들어 생산 투자가 줄고, 결국 고용과 소득이 줄어든다. 이로 인한 실직과 가난의 고통을 제대로 맛볼 자는 이미 퇴역했거나 퇴역을 맞이한 과거세대가 아니라 이제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미래세대다.
따라서 이 정권의 사회주의 재정확대광풍이 저지되려면 그 선두에 가장 피해당사자인 청장년 들이 서야 옳다. 그러나 오래 동안 좌파적 교육 문화 방송 영화 등에 사실상 지배되어온 이들은 대체로 시장경제의 상식에 무식하고 무관심하다. 사회주의 전유물인 동반 나눔 배려 기업의 악덕 같은 것에 감성적으로 묻혀 살아온 세대의 당연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유투브 카카오톡 등 새로운 사회적 미디어의 출현으로 한국의 여론형성지형도 어느 정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변화에 대한 한국청소년의 빼어난 적응력 자율성 등에도 기대를 걸만하다. 그러나 나라경제사회가 다 부서지고 잿더미만 남은 후라면 만사가 허사가 된다. 이 점을 오늘날 청년들이 빨리 각성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