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고토, 간도를 탐방하다.(1)
31운동 100주년, 광복 74년을 맞이하여 울산광역시 후원아래 8월27일(화)에서 31일(토)까지 4박5일간에 걸쳐서 우리나라 옛 고토인 간도를 탐방하였습니다..
실제로 한 반도 면적의 2배이상에 해당되는 동북3성(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은 그 크기와 지역이 방대하여 고구려유적과 항일투쟁지역, 국경접경지역(백두산,압록강,두만강)등의 중심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이번 여행은 나라(독도)사랑 국민운동본부 이사들과 독도산악회 회원들 모두 25명이 참석하고 하나투어 여행사의 안내와 조선족 가이드를 통하여 버스 이동경로 약 1,500km에 이르는 탐방이었습니다.
첫날 울산에서 김해공항으로 새벽에 출발하여 8시30분에 비행기가 이륙하여 약 2시간만에 중국의 10번째 도시라고 일컫는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국심양은 우리나라와 약 (-)1시간의 시차가 있으며 오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심양의 박물관과 북릉공원을 둘러 보았습니다.
인구 14억의 중국은 그 땅과 규모가 한 반도의 50배에 해당하는 크기로 과연 시설과 규모가 큰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역사속에서 한 반도의 문화와 유적은 오히려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을 통해 지나온 우리역사를 자기것으로 만드려는 속셈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북릉공원은 옛날에는 청소릉이라 불리웠는데 이는 청태종과 황후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이 청태종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인조임금으로 하여금 ‘삼전도의 굴욕’을 주었던 황제입니다. 이 삼전도의 굴욕이란 한양으로 쳐들어온 청나라에 의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는 결국 패하여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청태종은 수항단이라 불리우는 항복의식을 하게 되는데 이는 계단위의 청태종앞에서 흰옷을 입고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 세 번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소리와 피를 흘려 어깨까지 흘러야 항복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고나서 본 북릉공원은 우리민족에게는 굴욕과 수치의 공원임을 알고 역사의 교훈앞에 관광이 아닌 반성과 교훈의 공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우리들은 대절버스를 타고 약 4시간을 달려 통화로 이동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의 식당에서 중국현지의 식사를 하였는데 우리 한국식당과는 달리 돌아가는 테이블에서 반찬을 들어서 먹는 방식이었는데 한국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식당이라 김치등이 준비되었고 대부분 기름이 많이 들어간 음식이지만 첫날은 그렇게 양껏 먹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호텔에는 tv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질과 채널이 다양하지 않고 마치 우리나라 80년대의 내용처럼 진부하여 끄고 일찍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여행 2틀째인 28일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간단히 중국식 빵과 스프등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버스를 타고 고구려 유적이 있는 집안으로 약 2시간을 달려서 북한과 마주보는 압록강지역을 돌아 보았습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집안의 도시안에 고구려의 국내성터가 시내안에 남아 있었고 집안시의 주위 산에도 성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압록강변의 만포마을이라 하는곳에 내렸는데 여기 오기전에 생각했던 압록강보다 훨씬 더 가까이 느껴지는 압록강을 사이에 둔 중국과 북한과의 거리는 약 150m 거리밖에 안되어 보여 겨울에는 그냥 걸어서도 갈수 있는 정말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보트를 타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을 만든 중국과 달리 북한땅은 아무런 인공적인 어떠한 구조물도 없이 그냥 군데 군데 초소만 있어 군인들이 이곳을 주시할 뿐 같은 공산국가라도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는 동족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왕복하였으며 물의 깊이 또한 2m가 안되어 물속을 훤히 들여다 보이는 한국의 어느 강보다도 가깝게 느껴지기에 안타깝기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동하여 버스로 약30분 달려 광개토왕릉과 대왕비, 그리고 장수왕릉을 탐방하였는데 그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고 들어가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그 옛날 고구려의 가장 번영때의 기상과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한 우리조상들의 기개와 위상을 느낄수 있었는데 특히 광개토왕비는 일제시대와 중국의 동북공정을 거치면서 비문에 새겨진 약 1775자 가운데 20자를 일본이 수정하였다는 음모설이 있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곧 ‘신묘년조’로 일컫는 위 문구를 근거로 일본 학자들은 왜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해 신하 된 백성(신민)으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두고 북방의 강자이던 고구려와 대립할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파악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가 4세기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 즉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쨌든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과대평가하였고 중국과 일본의 조작설과 함께 아직도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의 전성기때의 기념비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광개토왕릉에 비해 장수왕릉이 더 번듯한 것은 아무래도 장수왕은 98세까지 살면서 자신의 무덤을 철저히 준비한 것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백두산의 천지가 흘러서 남쪽지역으로 간 송강하로 약 4시간을 달려서 저녁 7시 반경에 도착하였고 그 때의 날씨는 약간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도착하였습니다.
지난날 만주 대 평원을 달리던 고구려의 기상이 깃든 간도지역은 한국과 달리 끝없는 평원이 이어진 곳으로 곳곳에 한 민족의 얼이 담긴 땅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된다’는 말처럼 하루속히 자유통일이 되어 조상들의 위상을 찾고 다시한번 아시아의 등불로 우뚝솓는 때가 오기를 우리 모두는 바라며 이 밤도 꿈을 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