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고토를 탐방하다.(2)
▲ 잃어버린 땅 고토를 다녀온 나라(독도)사랑 국민운동본부와 독도사랑 산악회 회원들의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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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우리는 드디어 백두산을 향하여 일찍 나섰었습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그 높이가 2,750m 면적은 9.165 km²,둘레 14.4 km,평균 깊이 213.43 m,최대 수심은 384 m이며, 수량(水量)은 19억5,500만 m³로서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이다.
백두산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명산이었으나 6.25전쟁 후에 중공군이 북한의 김일성에게 전쟁의 댓가로 백두산을 반으로 나누어 현재까지 이르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사실상 통일이 되지 않는 한 북한쪽에서는 백두산으로 오르기는 불가능 한 것을 생각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있는 백두산을 중국을 통해 오르고 있으며 또한 가는 길에 중국사람과 남한 사람들이 거의 반반정도가 남한에서 관광오는 사람들일 정도로 백두산 관광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백두산을 향하여 입구에서부터 약 30분 정도 대형버스로 이동하는데 국경지역인 고로 여권과 통행을 확인 한 후에라야 들어 갈수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이제는 정상까지 약 20분을 소형승합차로 지그재그의 길을 올라간 후에야 비로서 천지가 내려다 보이는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약 100m 간격으로 2차선의 도로를 약 100여대의 승합차가 오르고 내리는 것을 볼 때 고산지대의 산에 나무들이 거의 없고 자작나무를 제외하고는 거의다가 언덕과 에델바이스와 같은 고산 지대의 풀들만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독도와 마찬가지로 백두산 정상의 기후가 수시로 변하며 비가 오기도 하고 안개가 올라와 10번에 2번꼴로 백두산 천지를 볼수 있다고 하니 ‘기도를 하고 산신령이 허락해야만 천지를 볼수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우리는 기대와 설레임으로 드디어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산중턱에서 줄지어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족히 약 2,000여명은 되어 보였습니다. a코스와 b코스가 있었는데 a코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대부분은 b코스에서 천지의 안개가 걷히고 멀리 아래 내려다 보이는 천지를 볼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a코스까지 다 보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그 경관이 장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즉석 사진을 찍고, 기념품도 사면서 약 2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내려가서 이제는 왼쪽으로 돌아가 장백폭포를 보기 위해 다시 화산으로 이루어진 산등성과 기괴한 바위와 돌로 폭포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암괴석 사이의 장백폭포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폭포가 다다를수록 여러곳에서 지면에서 올라오는 온천수가 증기를 내 뿜으며 연기가 오르며 뜨거운 온천수가 주위에서 올라 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물에 손을 씻기도 하고 먹어보기도 하였는데 장백폭포가 내려다 보이는 맨 앞에서 우리가 가져간 깃대를 들고 인터뷰를 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온 목적이 관광보다도 우리의 영토를 장래에 회복하기 위한 사실을 가슴에 안고 깃대를 흔들었는데 이것이 중국의 감시원에게 들켜서 그 깃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가이드가 벌금을 내고 무마되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한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우리글로 된 인쇄물을 펼칠 수 가 있었는데 최근 중국과 북한, 그리고 남한의 여러 정치적 상황과 중국 공산당 70주년기념등과 겹쳐서 입국절차와 이러한 태극기를 펼치는 일들을 단속하고 있다고 하여 우리는 이러한 단속에 사진을 지우고 가이드에게 제제를 받으니 기분이 좀 다운되었습니다.
우리는 장백폭포를 보고 난 후 송이버섯과 삼겹살로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는 약 3시간 반을 버스를 타고 용정이라고 하는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우리나라 독립군들과 윤동주가 살았다는 혜란강, 일송정이 있는 우리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연길로 이동하였습니다. 또한 그 곳에서 여정을 풀었고 오늘 바빳던 여정을 푸느라 발맛사지도 받고 추가로 북한사람들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북한과 중국 그리고 조선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길림성, 우리가 이제까지 연변이라고 일컫는 연길의 밤거리를 보면서. 조국의 통일과 간도회복이라는 무거운 민족적 과제를 생각하며 잠을 청하였고. 호텔에서 미리 조선족 선교사라고 하는 우리 동포를 만나서 우리가 가져간 선물, 곧 한국의 학용.품들과 축구공과 스포츠용품을 전달하면서 멀리 타국이지만 우리의 피가 흐르는 동포들의 다음세대가 부디 자유통일이 되었을 때 이 땅을 다시 찾고 장차 동북삼성을 회복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재목으로 커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전달 하였습니다.
다음날 사실상 이번 여행의 마지막 하루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날들이 생각나고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리는 넓은 만주벌판이 숨쉬고 있는 연변을 향하여 끝없는 언덕과 옥수수가 자라난 들판을 달리면서 일제시대때 항일투쟁의 중심이었던 봉오봉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장소와 또한 용정마을의 우물과 1919년 3.1절 운동당시 국내외에서 전개된 수많은 3.1운동 중 가장 큰 규모의 운동으로, 북간도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펼쳤고 용정에서 3만명이 모여 시위를 진행했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시위 참가자 중 13명이 사망한 것을 기념한 묘지를 참배하였다.
그 후에 우리는 두만강이 내려다 보이는 공원에 도착하여 저 멀리 북한을 뒤로 한 채 사진도 찍고 접경지역에서의 폐쇄되고 감옥국가가 되어 버린채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 관광상품이 되어버린 한 민족 두 국가의 비애를 느끼면서 이제는 고속열차를 타고 다시 심양으로 가기 위해 용정역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약 1,200km를 함께 이동한 버스를 보내고 우리는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약 1,300km의 거리를 약 시속 300km로 달리는 중국의 고속열차는 이 보다 더 빠른 450km급의 열차도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땅 만큼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이동거리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우리는 약 4시간에 걸쳐서 심양을 향해 가는 내내 기차 좌우에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과 그 땅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겨우 5시경 심양에 도착하여 가까운 호텔에 짐을 풀고 마지막 저녘식사를 하고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내었다.
그 다음 아침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심양국제 공항을 향해 가면서 심양의 코리아타운 서탑가를 지났지만 오전이라 문이 닫혀 있었고 한국간판이 즐비하게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코리아타운임을 알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김해국제공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여기서 준비해간 ‘독도수호 간도(연구)회복, 간도탐방단’이라는 프랭카드를 한국의 김해공항에서 펼치고 사진을 찍었지만 언제가는 동북3성을 회복하여 세계 유슈의 경제전문가와 정치전문가들이 말한 ‘대한민국이 지금의 헌법과 자유민주통일로 북한을 흡수 통일한다면 2045년에는 아시아에서 강대국이 되어 장차 중국을 누르고 그들의 고토인 동북3성(간도)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을 이루기를.. 우리는 이번 간도탐방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보았고 그 때를 위한 작은 포석과도 같은 우리의 탐방이 되었다는 이번 여행의 참 뜻을 울산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되새기며 올 수 있었다.
백두산 천지흘러 동북 끝에 다다르고
폭포수 용암만나 식을 줄을 모르나
아리랑 고개넘실 때 하늘도성 길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