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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와대책
이 일걸 간도학회장의 우리땅 간도지역(동북3성) 소유권변천과정
독도수호 간도회복을 위한 노력
기사입력: 2022/01/03 [15:33]  최종편집: ⓒ TOP시사뉴스
서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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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일걸 간도학회장

 

이 일 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약 력

성균관대학교 학사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 취득(국제정치외교학 전공)

 * 간도지역 역사, 간도분쟁사 연구, 한중외교사 연구

 

본 top사사뉴스 편집부 에서는  한국외교문화영토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독보적인 연구와 논문으로  알려져 있는 이일걸 박사(간도학회 회장)의 논문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있는 국민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간도지역 지도 변천과정에 나타난 간도영역 고찰

(2016 한국간도학회 학술세미나 발표)

 

 

. 서 론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우리나라 지리부도의 북쪽 경계는 압록강 - 두만강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여행 및 관굉지도 등에도 이의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지도에 대하여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간도에 관심을 가진 이후부터 우리나라 전체 영토가 나타나는 전도에 대해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도데체 누가 어떤 근거에서 이런 지도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까? 역사적 자료에는 압록강 대안에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관리사로 임명했으며, 두만강 대안의 부간도지역에 1902년에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이듬해 간도관리사로 승진시켜 임명하였다. 이들이 부임하여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호적안을 작성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렇다면 압록강 - 두만강 대안의 영토인 간도지역까지 우리 정부의 통치력이 미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간도지역이 우리 한국의 영토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광복이후 우리는 이런 지도를 계속 사용하여 왔다. 결국 우리정부는 축소된 지도를 가지고 국민들에게 압록강 - 두만강 이남이 우리 영토라고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부터 우리의 통치력이 미쳤던 간도지역이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표시한 서양고지도들이 21세기 초에 유럽에 유학한 학자들이 귀국하여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서양고지도가 18세기 초 강희제가 서양신부로 하여금 측량하여 만든 황여전람도의 동판을 근거해서 만든 지도였다. 황여전람도에 근거해서 만들었으니 사실을 왜곡했거나 변조한 지도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칭 간도연구를 전공한다는 소수의 학자는 이 서양고지도를 존재를 몰라서인지 몰라도 그의 저슬에는 서양고지도의 간도영토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소수의 우리 지도에도 북간도가 두만강 대안에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히려 조선 이후 압록강 - 두만강선으로 국경이 확정되었으며, 간도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학자는 대한민국의 학자인지 중국의 학자인지 아니면 매국노인지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우리의 국경선이 압록강 - 두만강선으로 굳혀진 사건은 1909년 청 · 일간에 체결한 간도협약이었다. 간도협약의 내용 중 제1조에 도문강을 한 · 청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원류지역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석을수로 국경선으로 한다는 규정에 의해 일본은 이를 지키려고 하였으며, 이듬해 한국을 병합하여 이 간도협약의 규정을 시행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으로 말미암아 서간도지역은 백두산정계비의 서위압록 동위토문에 의해 청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동간도는 북간도 부분인 동간도 동부를 한 · 청인의 잡거구역으로 설정하여 청에 넘겨주었다. 따라서 간도협약으로 인해 동·서간도지역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 내로 축소작업을 진행중이었기에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2세 교육을 담당하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은 식민사학자인 이병도,이기백, 한우근 등의 학설에 따라 왜곡된 지도를 표시하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 영토의 축소과정에 일제식민사관의 이어받은 식민사학자들의 영향력이 가장 켰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자료들을 관련 문헌과 비교한 후 황여전람도에 근거한 서양고지도 등을 참고하여 간도영역의 변천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 조선의 국경이 압록강 - 두만강선으로 획정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1. 조선의 국경이 압록강 - 두만강선으로 확전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

. 세종 때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조선의 국경선이 압록강 - 두만강선으로 확정되었다는 설에 대한 비판

이병도는 세종 데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조선의 북계가 완전히 두만강과 압록강의 상류에까지 이르렸다고 하였다.이기백도 이 때 오늘날의 한국 영토가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한우근도 “4군과 6진의 개척은 조선의 강역이 두만강과 압록강의 상류에까지 완전히 뻗치게 되어서 그것이 오늘의 영역의 기반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병도 이후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일한 주장을 하여왔다,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없다. 이들 주장에 대한 비판을 해보자

 

첫째, 이들의 주장은 특히 이병도의 상투적인 이론 전개 형태인 그저 막연한주장으로 그럴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병도의 제자들인 이기백과 한영우 등은 스승 이병도의 설을 비판없이 따랐다. 설혹 조선이 압록강 - 두만강으로 국경을 확정하였다고 하면 상대국은 누구인가. 당시 여진은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국경선이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초기에는 윤관의 동북9축성과 두만강 7백리 북쪽에 위치한 공험진의 선춘령에 세운 척경비가 조선의 북쪽 영토라는 인식이었다. 이미 조선 성종 때 편찬하고, 중중 때 새로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공험진은 소하강변에 옛 터가 있고, 선춘령은 두만강북 7백리에 있으며, 윤관은 개척한 공헌진에 성을 쌓고 선춘령상에 비를 세워 4면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을 새겼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사지리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음을 부기하였다

 

또한 세종실록의 지리지에도 공험진과 선춘령의 기사가 나온다. 고려 예종 이후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공험진에 척경비를 세워 고려의 동북국경을 공험진선으로 확정함으로써, 이후 조선왕조 수립 초기 태종과 세종이 공험진 이남을 조선의 영토임을 강력히 요구하여 국경선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그러나 이들 식민사학자들은 이런 중요한 사료를 무시하는 것이 이병도 이후 원칙이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연재 됩니다(주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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